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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연화리 유적(漆谷 蓮花里 遺蹟)Ⅰ·Ⅱ·Ⅲ·Ⅳ·구샘池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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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적 명칠곡 영남권화물터미널 및 컨테이너기지조성부지내 유적 문화재청 허가번호제2008-64호
유적위치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일원 발굴유형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일원
조사기간2008.03.24. ~ 2009.07.27.
조사면적시굴) 99,400㎡, 정밀) 37,300㎡
유적종류생활, 분묘 유    형건물지, 수혈, 구, 회곽묘, 우물, 주혈, 구, 수혈, 석곽묘, 석축연못
시    대Ⅰ·Ⅱ구역, 구샘지당 : 고려~조선, Ⅲ구역 : 통일신라~조선, Ⅳ구역 : 조선시대
내    용

  칠곡 연화리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사업대상지내 4개구역 및 구샘지당에서 통일신라시대에서조선시대에 이르는 건물지, 주거지, 회곽묘 등을 포함한 439기의 유구에서 2,212점의 다종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제구역>

제Ⅰ-A구역은 전체 170기의 유구 중 수혈 122기, 구 46기로 98%이상을 차지한다. 특히 수혈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수혈은 특성상 그 성격이 불분명하여 용도를 비정하기 어려운편이지만 내부 구조나 상태 등을 근거로 단순수혈과 소성관련 수혈, 고상식건물지나 주거지, 창고 등과 같은 건물지와 관련된 수혈 등으로 구분할 수 있겠다. 유구의 조성시기는 출토된 유물 중 절대연대를 보여주는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백자류의 굽과 내면에 굵은 모래받침을 사용한 점, 철화백자가 출토된 점 등의 유물상으로 미루어 조선시대 후기로 판단된다.

제Ⅰ-B구역은 고려시대 건물지와 조선시대 회곽묘로 대별된다 제Ⅰ-B구역이 경사가 급한 구릉의 사면에 입지하고 있어 조사 당시 건물지의 대부분은 유실되어 정확한 규모나 구조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건물의 규모가 소형인점, 청자제기향완와 금동불상이 출토된 점 등을 근거로 암자로 추정하였고 조성시기는 청자의 속성으로 보아 12세기 후반 이후로 편년하였다. 더불어 인근에서 조사된 봉계리청자가마 출토품과의 비교를 통해 연화리지역을 당시 생산된 청자소비지의 한곳으로 비정하였다. 조선시대 회곽묘는 외피물인 회를 비롯하여 내부의 목곽·목관이 매우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었고 목관의 내부에서 미이라와 염습제구가 출토되었다. 회곽묘의 조사과정을 새롭게 정리하면서 실시된 기존사료와의 비교 검토를 통해 연화리 회곽묘의 축조방법이 조선시대 전기와 후기의 과도기에 위치함을 알 수 있었으며 출토된 복식의 고증과 관재의 연륜연대측정치를 통해 17세기 중반이후라는 연대치를 도출하였다. 특히 명정을 근거로 문헌자료를 추적한 결과 묘주가 張復吉(1624~1685)임을 밝혀냄과 동시에 앞서 도출한 각종연구 및 분석치와 공감하는 연대를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이 매우 큰 성과였다고 할 수 있다.

<제Ⅱ구역>

3개소로 구분하여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는데 각 구역별 유구의 분포범위가 매우 협소하여 뚜렷한 결과를 도출하기는 어렵웠다. 다만 조사된 수혈과 구 등이 제Ⅰ구역의 조사내용과 대동소이하여 동시기 이 일대를 중심으로 한 취락의 범위 및 공간배치 설정의 근거자료로 활용할 수 있겠다.

<구샘池塘>

연화리 바깥뒤올과 안뒤올마을 사이의 저지대에 위치한다. 마을주민들의 전언에 따르면 고려 태조인 왕건이 팔공산에서 대패한 뒤 이곳에 서물을 마신 곳으로 전해지는 못이다. 池塘의 평면형태는 제형에 가까운 부정형으로 네 벽면 중 북·서벽에 비해 동·남벽 이 짧은 형태로 못을 조성하기 위해 굴광한 후 가장자리를 따라 석축한 구조이며 규모는 직경 14m 내외, 깊이는 최대 2.5m 정도이다. 석축은 최대 13단 정도가 남았는데 하단부는비교적 큰 할석을 횡평적하여 정연하게 쌓은 반면 상단부로 갈수록 소형 할석을 종횡혼용하여 축조하였다. 그 시기와 관련된 유구나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池塘은 유구의 중복관계를 통해 16세기 이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한편 구샘池塘은 조사후 상부를 복토하여 현지의 지하에 보존토록하였다.

 

<제Ⅲ구역>

통일신라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생활유적이 확인되는데, 주거지, 건물지, 삼가마가 대표적이다. 주거지는 자연지형의 삭평으로 인해 정형화된 형태를 보이고 있지 않아 평면형태에 따른 구분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내부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기준으로 통일신라시대와 조선시대 주거지로 구분할 수 있었다. 제1~3호에서 확인된 분청자류는 대부분이 인화기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당초문이나 변형여 의두문이 시문되어 있어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로 편년하였고, 제4·5호는 중복조성되었으며, 제5호에서 출토된 종장연속문을 통해 8세기대로 비정하였다.

건물지는 입지나 조성방법에 따라 제1·2호 건물지와 제3호 건물지로 구분되는데, 건물의 평면형태나 성격에 있어서는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특히 난방과 취사시설의 하부구조인 아궁이(부엌)가 확인되고 그에 접하여 안방이나 윗방, 마루, 건넌방 등이 확인되는‘一’자형 가옥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유물은 토기·자기류, 기와류, 토제품, 금속류 등 다종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유물의 제작속성으로 보아 제1·2호는 고려 말에 조성되어 조선 중기까지 유존하였고, 제3호는 제1·2호보다 늦은 조선 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삼가마는 인접하여 조사된 연화리 산104-14유적의 삼가마와 유사한 형태이며, 양자가 지근거리에 조성된 점으로 보아 가마의 사용자는 동일한 집단으로 추정하였으며, 사용시기는 출토유물과 AMS연대측정치로 보아 본 유적의 삼가마가 후대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았다.

<제Ⅳ구역>

A·B구역으로 구분하여 조사되었는데, 제Ⅳ-A구역에서는 조선시대 건물지군이 확인되었다. 건물지의 평면형태, 주초석의 배치상태 및 중복양상과 기단의 축조방법 등을 통해 건물지간 선후관계를 파악하였고, 주변에서 조사된 자료를 통해 서당건물(동편건물지군)과 주거건물(서편건물지군)로 비정하였다.

또한, 출토유물의 분석을 통해 건물지가 전용되는 중심시기를 15세기 중반에서 16세기대로 설정하였다. 한편, 서당건물로 추정한 동편건물지군 중 주요건물은 조사가 완료된 후 인접한 공원부지로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제Ⅳ-B구역 주거지는 모두 4기가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