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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천군동 큰마을유적(慶州 千軍洞 큰마을遺蹟)I,II,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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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적 명경주도시계획 보문유원지(천군지구)시설사업부지내 유적 문화재청 허가번호제2014-0506호
유적위치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 620번지 일원 발굴유형시굴, 정밀발굴
조사기간2014.05.21. ~ 2021.5.04.
조사면적시굴 : 469,278㎡, 정밀발굴 : 86,562㎡ (제Ⅰ-1구역 : 45,240㎡, 제Ⅰ-2구역 : 41,322㎡)
유적종류생활, 생산, 분묘, 산업 유    형청동기 주거지, 고상건물지, 수혈, 방형구, 구, 초기철기 주거지, 수혈, 원삼국 제철유구, 토기가마, 수혈, 매납유구, 구, 삼국시대 묘, 통일신라 수혈, 구, 적심, 고려 기와가마, 주거지, 수혈, 조선 주거지, 수혈, 구, 기와가마,암거, 매납유구, 우물, 시대미상 고상건물지, 구, 수혈, 야외노지, 탄요, 도로유구, 묘, 주혈군
시    대청동기~조선, 시대미상
내    용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생활·생산·분묘유구 433기를 조사하였고, 1,980건 2,064점의 관련유물이 출토되어 대규모 복합유적임을 확인하였다.

유적은 지리적으로 경주시내와 동해안, 울산, 포항방면을 잇는 교통의 결절지로 주변 지역과의 문화교류가 원활한 지점에 위치한다. 자연환경도 선상지와 충적지가 결합된 넓은 들판에서는 농경이 가능하고, 전면에 흐르는 신평천과 북천에서는 어로와 식수확보가 용이하며, 주변을 둘러싼 구릉에서는 식료품 채집과 수렵이 가능하여 사람이 거주하는데 최상의 입지조건을 갖춘 곳이다.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로 신석기시대 중기의 즐문토기편이 출토되었으나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청동기시대 유구는 250기가 조사되었는데, 주거지가 223기로 압도적으로 많다. 동사업지구 내 유적에 서 확인된 주거지를 포함하면 400여 기로 지금까지 경주지역에서 확인된 최대 규모의 취락유적이다. 취락은 청동기시대의 조기 또는 전기의 이른 시기에 소규모 취락으로 출발하여, 전기에는 취락이 점차 확대되고, 후기에 이르면 대규모 취락을 형성하는 흐름을 보인다. 조기 취락은 2동 내외의 대형주거지로 구성되었으며, 석상위석식노지를 갖추고 돌대문토기와 이중구연토기가 공반 출토되는 특징을 보인다. 전기 취락의 주거지는 장방형·세장방형으로 내부노지는 단수와 복수의 무시설식이며, 구순각목문, 단사선문, 공렬문계 돌류문 등이 결합된 가락동식과 흔암리식 토기가 출토된다. 후기취락은 소형화된 장방형·방형주거지로 내부노지는 단수의 무시설식이 한쪽으로 편재된 특징을 보인다. 그리고 연암동형 및 울산식 주거지가 함께 공존한다. 유물은 횡선문, 공렬문계 돌류문, 낟알문 등의 검단리식토기가 주로 출토된다.

초기철기시대 유구는 주거지, 수혈이 확인되었는데, 10기 정도로 구성된 취락으로 보인다. 주거지는 내부시설은 확인되지 않는 특징을 보이고, 삼각형점토대토기와 두형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조성시기는 출토유물로 보아 기원전 2세기 말~기원전 1세기 전엽으로 편년해 볼 수 있다.

원삼국시대 유구는 분묘가 주를 이루며, 제철유구(용해로)와 토기가마 등이 확인되었다. 분묘는 목관묘, 목곽묘, 옹관묘가 확인되었는데, 중복 없이 묘역을 달리하여 조성된 특징을 보인다. 목관묘는 통나무식과 판재식 목관이 사용되었고, 호형대구, 청동검파부철검 등 격이 높은 유물도 부장되며, 조성시기는 2세기 전엽부터 중엽, 목곽묘는 노형토기가 출토되는 단계로 2세기 후엽에서 3세기 전엽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토기가마는 3세기 대에 조업했던 것으로 천정부 조성시 내부에 기둥을 세운 구조가 특징적이다. 아직 영남지방에서 이 시기에 해당하는 토기가마가 분명하게 보고된 바 없어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제철유구는 주조철부를 생산한 용해로로 원료는 울산 달천광산에서 가져온 것으로 파악되었고, 완성된 철제품은 경주시가지로 유통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성시기는 2세기 후반~3세기로 보인다. 원삼국시대 유구들은 초기신라 사로국 문화상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삼국시대 유구는 분묘가 주를 이루며, 석곽묘, 석실묘, 토광묘가 확인되고, 천변의 충적지에 분포하는 특징을 보인다. 조성시기는 5세기 4/4분기에서 7세기 중엽까지로 석곽묘에서 석실묘로 변화하는 양상을 잘 보여준다.

통일신라시대 유구는 천군동 사지 관련유구가 대부분이며, 사역추정범위는 시굴조사 후 원형보존하였다. 현재 천군동 사지는 사적으로 관리되고, 보물인 동·서 삼층탑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 남문지, 금당, 강당지가 조사된 바 있고, 이번 조사를 통해서는 연지, 사찰부속건물지, 당간지주 등을 확인하였다. 출토유물을 통해보면 격이 높아 왕실에서 건립한 것으로 보이며, 초창시기는 8세기 초로 추정된다.

고려~조선시대 유구는 생산시설인 기와가마와 공방지가 확인되었다. 기와가마는 나말여초에서 여말선초까지 지속적으로 조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에서 생산된 기와는 천군동 사지 또는 경주시내와 외곽지역으로 공급된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천군동 큰마을유적은 청동기시대 대규모 취락, 초기철기시대 취락, 원삼국시대 분묘·토기가마·용해로, 삼국시대 분묘, 통일신라시대 천군동 사지, 고려~조선시대의 기와가마 등이 조성된 대규모 복합유적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발굴성과는 경주 동부지역의 선사시대 이후의 문화상을 이해하고 복원하는데, 새로운 기초자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