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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박곡리 661-15유적(高靈 朴谷里 661-15遺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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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적 명고령 봉화산 정비사업(공작물)부지 내 유적 문화재청 허가번호제2020-0936호
유적위치고령 성산면 박곡리 661-15 발굴유형정밀
조사기간2020.07.06. ~ 2020.09.01.
조사면적2,700㎡
유적종류생활, 분묘 유    형대가야 주거지,수혈, 구, 통일신라시대 석실분, 시대미상 수혈, 주혈군
시    대대가야, 통일신라, 시대미상
내    용

삼국(대가야)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생활 및 분묘 유구가 조사되었고, 유구의 안팎에서 토도류와 금속류 등의 관련 유물이 출토되었다.

 

유적에서 대가야의 유구는 주거지 10기, 수혈 2기, 구 2기가 확인·조사되었다. 조사된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장방형계와 원형계로 나뉘며, 내부시설로는 주혈과 수혈 및 노지 등이 확인되었다. 원형계 주거지는 취락 내 수혈과 함께 공방지 혹은 창고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며, 구는 동시기 인접한 유구의 보호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구에서는 파수, 단경호편, 장경호편, 시루편, 적갈색연질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는데, 선행연구와 비교하면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으로 편년해 볼 수 있다. 박곡리의 대가야 취락은 봉화산의 북쪽 구릉 사면 전반에 걸쳐 조성된 대규모 취락으로 연결되는 남쪽 구릉에 축조된 봉화산성과 연계된 취락임이 분명하다.

 

통일신라시대 유구는 석실분 1기가 확인·조사되었다. 석실분은 석실 1기와 최소형 석곽 1기로 이루어져 있다. 석실은 남향의 횡장방형에 입구는 전방에서 우편재한다. 부석시설은 시상대와 부장대, 부장칸으로 마련하였으며, 후벽 및 좌우벽에 붙여 마련한 시상대의 바닥면에는 고임석이 확인된다. 유물은 개, 대부완, 병편 등이 출토되었으며, 기형과 문양으로 보아 7세기 후엽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그 피장자는 봉화산성의 관리주체로 추정된다.

 

한편, 정치사적 관점에서야 대가야시대 취락은 신라와의 병합 이후, 폐기되었다고 보아야겠지만 실제 취락의 존속시기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대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이후에도 봉화산성은 계속 운영되었으며, 이와 연계된 박곡리의 대가야 취락 역시 일정기간 존속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생활공간과 분묘공간의 분리라는 측면에서 보면, 7세기 후엽 석실분이 축조될 당시에는 유적의 취락은 해체되고 강정리 마을 등의 자연부락이 위치하는 곳으로 취락이 이동되거나 주변 마을로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상 박곡리 661-15유적의 경우, 근래의 계단식 경작과 방공호의 축조, 최근에 행해진 대규모의 형질 변경으로 인해 유구는 유존상태가 양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가야 국경에 해당되는 외곽지의 산성과 연계된 취락의 일단이 밝혀졌고, 석실분 역시 봉화산성과 연계하여 단편적으로나마 고찰해 볼 수 있었다. 더불어 가파른 사면에 조성한 취락의 입지조건은 대가야 왕도에서 일반 거주민들이 생활하던 취락의 위치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