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봉평리 601-3유적(高靈 鳳坪里 601-3遺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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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적 명 | 고령 운수면 보건지소 이전 신축부지내 유적 | 문화재청 허가번호 | 제009-91호 |
유적위치 |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봉평리 601-3번지 일원 | 발굴유형 | 시굴, 정밀발굴 |
조사기간 | 2009.03.11. ~ 2009.04.14. | ||
조사면적 | 2,489㎡ | ||
유적종류 | 분묘, 생활 | 유 형 | 석관묘, 구, 수혈, 주혈 |
시 대 | 청동기, 조선 | ||
내 용 | 고령 봉평리 601-3유적이 위치한 운수면 봉평리 일대는 대가천의 하류역으로 넓은 충적지가 형성되어 있어 농경이 가능하고, 대가천의 풍부한 수량은 어자원과 식수를 공급해주며, 주변으로 잘 발달한 구릉에서는 채집과 수렵이 가능하여 사람이 거주하고 취락이 형성되는데 최상의 입지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이러한 입지를 기반으로 형성된 유적에서는 전면에 걸쳐 청동기시대 석관묘, 구, 수혈, 주혈과 조선시대 구, 수혈 등 19기의 유구가 확인되고 관련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 지석묘는 1970년대 이전 봉평리 지석묘Ⅰ로부터 봉평리 지석묘Ⅱ의 사이 400m 정도의 구간에 10여 기가 열을 지어 있었다는 동네 촌로들의 전언과 유적에서 조사된 석관묘 및 주변 지석묘의 분포양상을 통해 볼 때 충적지의 중앙부에 남북으로 길게 대규모 분묘공간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금번에 조사된 3기의 석관묘는 북편으로 접한 봉평리 지석묘Ⅱ와 동일한 군을 이루며 연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기본 구조는 묘광의 가장자리를 따라 홈을 내고 벽석을 세웠으며 바닥에는 시상을 깔고 개석을 덮은 형태로 인접한 봉평리 지석묘Ⅱ, 남서쪽으로 3.5㎞ 떨어진 쾌빈리유적에서 확인된 것들과 구조, 사용석재, 조성시기 면에서 유사성을 보인다. 그리고 이 석곽묘들은 지석묘의 하부구조라기 보다는 주변에 독립적으로 조성된 석곽묘로 보이며 아울러 지석묘 상석은 주변 석관묘군을 아우르는 묘표석의 기능을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격자상으로 구획된 대형 구(溝)는 인근지역의 대구 동천동취락유적, 대구 동호동유적, 대구매천동유적 등 청동기시대 대규모 취락지에서 확인된 것과 동일한 성격으로 취락에 딸린 경작지일 가능성이 높다. 그 외 수혈들은 구 주변에 분포하는데, 내부에 동물뼈와 목탄이 확인되어 수변제사와 관련된 의례수혈로 추정되는 것과 석기제작장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있는 것이 있다. 한편 유적에서는 미완성석부와 수백 점에 달하는 박편석기가 출토되었는데 북쪽으로 500m 정도 떨어져 조사된바 있는 봉평리석기제작장과 분포양상이 유사하여 주목된다. 이 석기제작장에서는 직경 20m 정도의 범위에 모루돌, 망치돌, 원석, 박편, 미완성석기 등 1,000 여 점의 석기들이 분포하고 중심부에서는 모루돌 주변으로 수 백점의 박편석기가 여러겹 포개져 밀집분포하는 양상이 확인되어 대규모 석기제작과정과 결과물의 실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고령 봉평리 601-3유적은 조사된 유구들의 검토를 통해 분묘와 생활유구 및 경작지가 포함된 복합유적으로 청동기시대 취락의 한 부분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주변의 조사성과를 종합하면 유적의 중심시기는 청동기시대 후기로 추정되며 이 시기에 이르러 봉평리 일대에는 대규모 취락이 조성되고 공간적으로는 분묘, 석기제작장, 경작지, 주거지 등이 분리배치된 구조를 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취락을 조성했던 집단은 대량의 석기를 제작하여 주변에 공급하고 농경과 어로, 수렵, 채집활동을 병행하여 생계수단 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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