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읍내동 491유적(大邱 邑內洞 491遺蹟)Ⅰ·Ⅱ·Ⅲ·Ⅳ
본문
유 적 명 | 대구 읍내동 491번지 일원 공동주택신축부지내 유적 | 문화재청 허가번호 | 제2006-688호 |
유적위치 |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 491번지 일원 | 발굴유형 | 시굴, 정밀발굴 |
조사기간 | 2006.09.28. ~ 2007.04.02. | ||
조사면적 | 시굴)6,794㎡ , 정밀)13,358㎡ | ||
유적종류 | 복합유적 | 유 형 | 유물산포지,주거지, 매납유구,우물, 수혈, 건물지, 구상유구, 매납유구, 저장유구, 부석, 석곽묘,폐기장, 배수암거, 석축렬, 수혈, 집수정, 구상유구, 부뚜막, 폐기장 |
시 대 | 청동기~조선시대 | ||
내 용 | ▪유적은 문헌기록에나오는 통일신라~조선시대의漆谷 公廨인 八居里縣, 八居縣(八莒縣), 漆谷都護府가 位置하였던 곳으로 파악. ▪제Ⅲ구역 조선시대 제1호 건물지는 1872년 제작된 조선후기 군현지도인「漆谷地圖」에 표기된 칠곡관아의 부속건물인 향청으로 확인됨. 대구 읍내동 491유적은 칠곡지역에서 처음 조사된 대규모 관청유적으로 조사과정에서 문헌 검토를 통하여 건물지의 위치를 찾아낸 대표적인 사례이다. 특히 이 일대는 통일신라시대 이후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칠곡지역의 중심부가 위치한 곳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단편적인 문헌자료와 조선시대 향교가 남아있어 대체적인 위치만 추정할 뿐 그 실체와 범위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 없다. 문헌에 기록된 공해에 대한 조사는 기록과 연결될 수 있는 유구의 판별이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따라서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조사과정에서 확인되는 시대별 유구들과 문헌기록들이 어떠한 연계성을 가졌는가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 결과 부분적이지만 통일신라시대 주거지를 비롯하여 고려·조선시대의 공해 중 하나로 추정되는 대형건물지를 포함한 다양한 생활유구들을 확인하고 동시에 문헌자료와의 비교·검토를 통해 칠곡지역 공해의 시대별 변화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적이 읍치의 중심부로부터 북쪽 외곽에 위치하므로 단위취락의 부분 모습만 보여줄 뿐 전체취락의 규모나 세부적인 성격 등을 모두 파악할 수 없었다는 한계가 있다. 유적이 위치한 읍내동 일대는 이러한 칠곡지역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는데 발굴조사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건물지와 주거지를 포함한 150기의 생활유구와 청동기시대 유물을 포함한 1,664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환형석부 1점을 비롯하여 무문토기저부가 확인되었고 북쪽으로 180m 정도 떨어진 ‘작은아시골’ 초입에 위치한 읍내동 253유적에서도 청동기시대 수혈 1기와 다수의 유물이 출토된 바 있어 팔거천 서안으로도 청동기문화가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유구는 주거지 14기, 매납유구 1기, 우물 1기, 수혈 1기 등 모두 17기가 확인되었는데 八里縣 일대에 조성된 여러 취락 중 북쪽외곽에 조성된 단위취락의 일부로 보인다. 취락의 구조는 3기 정도의 주거지가 그룹을 이루고 각 그룹은 약간의 이격거리를 두고배치되어 하나의 단위취락을 이루었으며 이러한 단위취락들이 모여 팔거현의 읍치를 이룬 구조로 파악된다. 고려시대 유구는 건물지 4동, 주거지 18기, 우물 1기, 구상유구 1기, 매납유구 4기, 저장유구 2기, 부석 1기, 석곽묘 1기, 폐기장 7기, 배수암거 1기, 석축렬 1기, 수혈 67기 등 모두108기가 확인되어 가장 많은 분포 빈도를 보이고 있었다. 조선시대 유구는 건물지 6동, 주거지 3기, 우물 2기, 집수정 5기, 구상유구 2기, 부뚜막 1기, 폐기장 1기, 석축렬 1기, 수혈 4기 등 모두 25기가 확인되었다. 취락내 유구들의 배치구조는 대형건물지를 중심으로 주변에 주거지와 우물이 들어서고 동쪽 하천변을 따라 길게석축렬이 조성되어 있으며 그 주변으로 집수정이 배치되어 있다. 이중 동쪽 하천변을 따라 조성된 150m 길이의 석축렬은 칠곡읍 치지의 북동편 경계부로 배후 부지를 확보함과 동시에 하천의 제방기능을 함으로서 남서쪽에 위치한 취락공간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유적이 위치한 읍내동 일대는 통일신라시대 이래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수백년 동안 八居里縣→八里縣→八居縣(또는八莒縣)→漆谷都護府→漆谷郡으로 명칭변경이 이루어졌으나 가산산성에 칠곡도호부가 옮겨진 180년간을 제외한 1,000여 년의 기간동안 칠곡지역의 읍치지가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번 읍내동 491유적이 칠곡지역 중심지의 북편 외곽에서 조사된 한정적인 범위의 유적이라는 점에서 다소 부족한 점은 있겠지만통일신라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150기의 중요 생활유구들이 조사됨으로서 문헌기록으로만 남아있던 칠곡 공해의 실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향후 이번 조사성과를 계기로 하여 칠곡의 읍치지역에 대한 추가조사가 진행되고 대구 일대의 여러 군현이 설치되었던 지역에 대한 조사자료가 부가된다면 문헌으로만 논의되던 통일신라시대 이후 지방군현에 대한 시대별 실상과 변화과정 연구에 실증적인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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