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지좌리 유적Ⅰ~Ⅳ, 김천 신옥리지석묘(金泉 智佐里 遺蹟Ⅰ~Ⅳ, 金泉 新玉里支石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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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적 명 | 김천 부항다목적댐 건설부지내(제2-1·8구역) 유적 | 문화재청 허가번호 | 제2008-0007호 |
유적위치 |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 사등리·지좌리·류촌리·신옥리 일원 | 발굴유형 | 시굴, 정밀 |
조사기간 | 2008.02.26. ~ 2010.04.30. | ||
조사면적 | 시굴) 276,687㎡, 정밀) 42,363㎡ | ||
유적종류 | 생활, 분묘 | 유 형 | 주거지, 토기요지, 야외노지,수혈, 고상건물지, 구, 건물지, 주거지, 지석묘 |
시 대 | 신석기, 청동기, 조선 | ||
내 용 | <지좌리 유적> 지좌리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대규모 취락과 조선시대 소규모 마을이 조사되었다. 발굴조사는 공동조사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지좌리 유적의 제2-1구역(40,811㎡)과 신옥리지석묘(1,552㎡)는 우리 연구원이 담당하고, 지좌리 유적의 제2-2구역(76,470㎡)은 (재)삼강문화재연구원이 분담하여 진행. 우리 연구원의 조사구역에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 6기, 토기요지 7기, 야외노지 5기, 수혈 16기와 청동기시대 주거지 132기, 고상건물지 10기, 수혈 92기, 야외노지 8기, 구 28기 및 조선시대 건물지 2기, 주거지 9기, 수혈 8기 등 총 323기의 유구가 조사되었고, 삼강문화재연구원의 구역에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 3기, 소성유구 2기와 청동기시대 주거지 134기, 고상건물지 16기, 수혈 91기, 구 33기, 석개토광묘 1기 및 조선시대 水田·水路 등이 확인되었다. 지좌리 유적은 험준한 산악지역에서 매우 넓은 충적지가 발달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자연방어적인 지형을 갖추고 겨울 계곡풍에도 온난한 장소이며, 풍부한 수량을 지닌 하천이 전면에 흐르고 있어 어로활동 및 식수확보가 용이하고, 주변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산악에서는 식료품 채집과 수렵이 가능한 위치에 있어 사람이 거주하는데 최상의 입지조건을 갖춘 곳이다. 이러한 천혜의 자연조건은 이곳에 선사시대로부터 취락이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발굴조사에서도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대규모 취락과 조선시대 소규모 취락이 조성되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신석기시대 취락은 동서 길이 550m, 남북 폭 100m 정도로 16,000여 평에 이르는 넓은 범위에 조성되어 있는데, 주거지, 토기요지, 야외노지, 수혈 등 모두 34기의 유구가 확인되고, 다수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지좌리 신석기취락의 조사에서 얻은 가장 큰 성과는 바로 신석기시대 후기를 대표할 수 있는‘智佐里式土器窯’라는 새로운 모델을 찾아낸 점이라 할 수 있다. 이 토기요의 특징으로는 주거군과 일정거리를 이격되어 하천의 상류방향에 조성한 입지, 하천 흐름과 직교하는 장축방향, 길이 8m 이상의 비교적 일정한 규격, 평면이 매우 긴 溝狀의 형태, 내부에 남아 있는 목탄열, 바닥면 무시설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주목되는 점은 중기 이전의 대형 원형 적석요에서 진행하던 개방형 소성방법을 지양하고, 덮개형 소성기술을 도입함으로써 토기소성에 있어 획기적인 경비절감과 기술의 발전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청동기시대의 취락범위는 동서 길이 800m, 남북 폭 100m 정도로 24,000여 평에 이른다. 취락은 충적지를 동-서방향으로 관통하는 자연수로(대동-제1호 구, 삼강-제13호 구)를 경계로 하여 지대가 높은 남쪽 미고지를 따라 집중조성되어 있으며, 비교적 지대가 낮은 북쪽은 경작지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시대 취락은 전기에서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축조되고 있는데, 충적지의 하반부에 편중해서는 각목돌대문토기를 공반하며 복수의 위석식 노지를 갖춘 가장 이른 단계의 세장방형 주거지가 6기 조성되어 있고, 그 외의 장방형주거지 59기, 방형주거지 35기, 원형주거지 166기는 취락 전면에 걸쳐 고루 분포하는 양상을 보인다. 하지만 형태에 따른 주거지의 분류가 반드시 시간적인 차이를 반영하지는 않으며, 전반적으로 세장방형과 장방형의 상당수는 전기에 해당하고, 방형과 원형주거지는 후기에 해당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청동기시대 후기에는 중복관계를 고려하더라도 동시기에 100~150여 기 정도의 대규모 취락을 구성하는 시점도 있어 감천 일대에서 가장 큰 중심취락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외 조선시대 유구로는 건물지 2기, 주거지 9기, 수혈 8기 등 모두 19기가 조사되었는데, 출토되는 백자의 특징으로 보아 중심시기는 16세기 대로 파악되어 조선전기에 양반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작은 마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옥리지석묘> 대형상석을 갖춘 지석묘 1기와 하부구조 1기가 각각 조사되었고, 내부에서 적색마연토기 구경부편 2점과 무문토기 동체부편 1점이 출토되었다. 지석묘의 조성시기는 출토유물이 적고 단순한 파편이어서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하부구조의 특징을 통해 살펴보았다. 먼저 지상식인 제1호 지석묘의 경우, 송죽리의 제1·4호 지석묘를 포함한 지상식 지석묘와 구조적인 면에서 연관성이 있어 청동기시대 중기~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았으며, 송죽리유적의 제Ⅱ·Ⅲ단계인 주거지와 지좌리 유적의 장방형계 및 원형 주거지들과 일정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제2호 지석묘는 소위‘구덩식’하부구조를 특징으로 하는데, 송죽리 제13·16·17·19호 지석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청동기시대 후기에 조성된 지석묘로 판단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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