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대천동467 유적(大邱 大泉洞467 遺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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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적 명 | 대구 대천동 467번지일원 대구한천초등학교 설립예정부지내 유적 | 문화재청 허가번호 | 제2011-0340호 |
유적위치 | 대구광역시 달서구 대천동 467번지 일원 | 발굴유형 | 정밀 |
조사기간 | 2011.06.13. ~ 2011.08.16. | ||
조사면적 | 3,525㎡ | ||
유적종류 | 생활, 분묘 | 유 형 | 주거지,석관묘, 옹관묘, 집석, 집수정, 구, 수혈, 노지,주혈군 |
시 대 | 청동기, 초기철기,통일신라, 시대미상 | ||
내 용 | 2개 구역에서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석관묘·추정옹관묘·집석, 초기철기시대의 집수정, 통일신라시대의 주거지·수혈·노지·구·주혈군 등 모두 25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그리고 유구의 내외부에서는 청동기, 통일신라시대 및 조선시대에 이르는 토기류·석기류·기와류·자기류 등이 다수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 유구는 밀집도가 현저히 떨어지지만 후기취락의 일부로 파악된다. 주거지는 형태적 특성이나 출토유물로 보아 소위 송국리형 주거지와 유사한 구조로 파악된다 .석관묘는 구조적인 특징과 내부에서 출토된 일단병식석검으로 미루어 청동기시대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 외 집석에서는 청동기시대 전기의 구순각목문토기편이 확인되었다. 이를 통하여 늦어도 청동기시대 전기이후에 이 일대가 생활공간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철기시대 문화는 자세히 알기 어렵지만 집수정에서 이중구연토기편 등이 확인되어 주변으로 동시기 취락이 위치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유구는 모두 제2구역에서 확인되었는데 유구의 유존상태가 좋지않고 배치양상 또한 정형성이 없어 그 성격을 밝히는데 어려움이 있다. 다만 주거지나 노지, 수혈, 주혈군과 같은 생활유구들과 내부에서 출토된 선조문기와편, 토기편 등으로 미루어 취락의 일부분임은 분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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