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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예산리 유적(星州 禮山里 遺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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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적 명성주 일반산업단지조성부지내 유적 문화재청 허가번호제2010-0322호
유적위치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금산·학산리 일원 발굴유형시굴, 정밀
조사기간2010.04.27. ~ 2011.03.31.
조사면적시굴: 90,891㎡, 정밀 : 58,144㎡
유적종류생활, 생산, 분묘 유    형주거지, 수혈, 가마, 노지, 구, 건물지, 고상식 건물지, 석실묘, 묘, 옹관묘, 화장묘
시    대원삼국, 삼국~통일신라, 고려, 조선, 시대미상, 일제강점기
내    용

성주 예산리유적은 성주분지의 중심에서 북쪽의 나지막한 능선과 곡간평야에 위치하고 있다.

발굴조사는 마을 주변에 위치한 경작지와 단독구릉의 능선사면, 곡간부를 대상으로 모두 13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발굴조사된 유구는 삼국~통일신라시대 석실묘를 비롯하여 고려~조선시대의 추정건물지, 주거지, 수혈, 구, 집석, 우물, 분묘, 주혈, 유물포함층 등 920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대부분 유존상태가 양호하지 못하지만 생활유구, 생산유구, 분묘 등 다양한 유구와 유물이 출토되어 동시기 성주지역의 생활상을 연구할 수 있는 기초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원삼국시대의 묘와 주거지는 자연지형의 삭평과 후대의 경작으로 인하여 대부분 유실된 상태이다. 주거지의 경우 평면형태가 타원형으로 내부구조가 인근의 성주 가암리유적에서 조사된 유구와 아주 유사하다. 그리고 인접한 성주 백전·예산리유적에서도 주거지가 확인되어 동시기 성주읍 주변으로 크고 작은 마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통일신라시대에는 석실묘, 주거지, 수혈, 가마, 노지, 구, 우물, 주혈군 등이 확인되었다. 유구의 조성시기는 시기를 가늠할 만한 유물들이 적어 자세히 알기 어려우나 일부 석실묘에서 출토된 단각고배와 뚜껑 등의 토기는 6세기 후반~7세기 전반에 편년된다. 또한, 제2구역에서 확인된 주거지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값이 4세기 후반에서 7세기 후반으로 측정된 점을 고려하면 늦어도 7세기 대에는 이 일대에 마을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시대 유구는 건물지, 주거지, 삼가마, 수혈, 구, 노지 등이 있다. 이 중 제11구역에서 확인된 제1호 건물지는 3채가 나란히 남향을 하고 있다. 가운데 건물만 초석을 사용한 기와집으로 조성되고 양쪽으로 초옥으로 추정되는 부속건물을 배치한 특이한 형태이다. 유물도 고급 청자들이 출토되어 재실이나 사당과 같은 특수한 목적을 가진 의례건물로 추정된다. 조성 시기는 13세기 초반 경으로 보인다. 그 외 유구들은 유존상태가 그리 양호하지 못하지만 고려시대에도 이곳에 마을이 조성되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조선시대 유구는 건물지, 주거지, 수혈, 요지, 노지, 분묘, 옹관묘, 구 등 다양한 유구들이 조성되었다. 이중 대부분은 분묘에 해당하는데, 시대미상으로 분류한 분묘들도 조선시대일 가능성이 높다. 분묘는 모두 마사토로 이루어진 풍화암반층을 굴착하고 조성되었는데, 묘광의 주축방향은 방위에 상관없이 능선과 직교되게 설치되었으며 피장자의 두향도 지형상 높은 방향으로 안치하였다. 묘제방식은 직장묘, 목관묘, 목곽묘로 구분되는데, 이 중 직장묘는 199기로 전체 과반수가 넘는 54.5%가 조성되어 가장 일반적이라 매장방식으로 나타난다. 목관묘는 146기로 40%, 목곽묘는 18기로 5%, 옹관묘는 2기로 0.5%가 조사되어 조선시대 이후 성주지역의 독특한 매장방식을 살펴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