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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양전리유적·고령 사부리요지·고령 기산리요지 (高靈 良田里遺蹟·高靈 沙鳧里窯址·高靈 箕山里窯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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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적 명고령 88올림픽고속도로 확장구간(14공구) 내 유적 문화재청 허가번호제2009-35호
유적위치(양전리유적)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양전리 373번지 일원 / (사부리요지)고령군 성산면 사부리 산68번지 일원 / (기산리요지)고령군 성산면 기산리 860번지 일원 발굴유형시굴, 정밀
조사기간2009.06.11. ~ 2010.11.05.
조사면적시굴: 34,830㎡, 정밀: 28,079㎡
유적종류양전동 : 분묘, 생활 사부리: 생산 기산리 : 생산 유    형(양전동) 옹관묘, 봉토분, 석곽묘,토광묘, 회곽묘, 건물지, 주거지, 수혈, 구, 노지, 주혈 / (사부리) 자기요, 폐기장, 와요, 수혈, 구 / (기산리) 요, 폐기장, 채토장,점토저장공, 구, 주혈
시    대(양전동) 초기철기~원삼국, 삼국(대가야), 조선 / (사부리) 조선 / (기산리) 조선
내    용

발굴조사는 88올림픽고속도로 확장공사구간에 대한 조사이며 확장구간 중 고령을 지나는 노선(제14공구)상에 분포하는 3개소의 유적에 대해 진행되었다.

 

<제Ⅰ구역: 양전리유적>

양전리유적에 대한 조사 결과 초기철기~원삼국시대의 옹관묘, 삼국(대가야)시대의 소형봉토분과 석곽묘, 조선시대의 건물지, 주거지, 토광묘, 회곽묘, 수혈, 구 등 75기의 유구에서 관련유물 613점이 출토되었다.

옹관묘는 남쪽 구릉의 하단부에서 1기가 확인되었는데, 길이 1.2m 정도로 무문토기질의 장동옹 1점을 횡치하여 매납한 단옹식이다. 옹의 형태는 저부가 유실되었고 저부에서 파수가 부착된 장란형의 동체부로 이어지다가 구경부에서 외반하는 형태이다. 옹관으로 사용된 장동옹 외에 공반된 유물이 없어 조성시기를 가늠하기 어렵지만, 태토와 기형으로 보아 초기철기~원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주변으로 청동기시대 유물이 채집된 양전리선사유적과 양전리지석묘, 반운리와질토기유적 등이 분포하고 있어 청동기시대부터 지속적으로 분묘조성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석곽묘는 축조방식에 있어 할석조과 판석조로 구분되며, 전자는 단곽식, 후자는 주부곽식으로 조성되었다. 또한 할석조 석곽에만 목관을 안치하였고, 축조과정에서 석곽의 바닥면을 일정 두께로 정지한 후 사용한 예는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석곽묘의 조성시기는 출토된 대가야 대부장경호와 저평통형기대 등을 근거로 동형의 유물이 출토된 타유적과의 비교를 통해 6세기 중반으로 비정하였다. 한편, 석곽묘에서 함께 공반된 신라계 유물의 존재로 보아 이 시기 양전리고분군을 축조한 집단과 신라권역과의 교류·교섭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주변에서 조사된 양전리와 반운리의 이전시기 고분의 축조양상을 통해 5세기 전반 이후가 되면 지금의 양전리고분군이 조성된 능선으로 묘역이 이동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조선시대의 유구는 건물지, 주거지와 같은 생활유적과 토광묘, 회곽묘와 같은 분묘유적이 함께 조성되었는데, 모두 지형의 삭평과 고속도로 건설에 따른 파괴 등으로 잔존상태가 매우 불량하였다. 조선시대 분묘에서는 시기를 가늠할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분묘의 조성시기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건물지에서 연호명 암키와가 출토되었는데, 이를 근거로 건물지는 16~17세기 전반까지 존속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제구역: 사부리요지>

유적에 대한 조사결과 조선시대의 자기가마, 기와가마, 수혈, 구 등 4기의 유구에서 관련유물 1,028점이 출토되었다.

조선전기 분청자를 생산하던 가마를 중심으로 주변에는 폐기장이 조성되었고, 이곳에서 북동편으로 인접하여 동시기에 조업된 것으로 보이는 기와가마 1기가 조성되었다. 사부리 자기가마에 대한 구조와 유물의 검토 결과 가마를 운영하던 집단은 이전부터 이어오던 상품자기소의 제작전통과 숙련된 경험을 통해 가마의 내부에 천장지주 불기둥을 조성하였고, 갑번된 양질의 백자를 생산하여 중앙에 공납한 집단으로 생각된다.

 

<제Ⅲ구역: 기산리요지>

조사결과 조선시대의 자기가마를 비롯하여 채토장, 점토저장공, 수혈, 구, 주혈 등 47기의 유구에서 관련유물 489점이 출토되었다.

유적은 조선전기 분청자를 생산하던 가마를 중심으로 주변에는 폐기장이 조성되었고, 이곳에서 남편으로 40m 정도 떨어진 충적지에는 원료채취장으로 사용되었던 각종 수혈이 위치한다. 가마는 비교적 가파른 사면에 조성되었는데, 아쉽게도 고속도로 건설과정에서 생긴 지형의 삭평에 의해 연소실과 아궁이는 유실된 상태였다. 그러나 소성실과 초벌실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었고, 가마의 주변에 조성된 폐기장에서 다량의 자기류가 출토되었다. 기산리가마는 구조면에서 사부리가마와 비슷한 형태를 보이지만, 사부리와는 달리 불기둥은 1개만 확인되었고, 각각의 측면출입구와 연계되는 원형의 폐기장이 조성된 점은 사부리가마와 구분되는 점이다.

가마에서 출토된 유물은 분청자가 대부분이며, 백자는 극히 소량 확인되었다. 분청자는 제작기법에 있어 국화문과 주름문이 인화+귀얄기법으로 사용되었으며, 기종에 있어서도 발·접시와 같은 반상기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갑발의 출토량은 분청자의 수량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양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물의 특징을 사부리가마 출토품과 비교해 본 결과 사부리는 양질의 백자와 분청자를 생산하던 공납용 가마, 기산리는 분청자 반상기를 주력으로 생산하던 민수용 가마였던 것으로 판단하였다. 가마의 조업시기는 출토유물의 분석을 근거로 사부리가마보다 약간 이른 시기에 개요되었던 것으로 파악하여 1440~1460년경으로 비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