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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고아리 373유적(高靈 古衙里 373遺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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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적 명고령 고아리 고아배수펌프장 설치공사부지내 유적 문화재청 허가번호제2010-625호
유적위치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고아리 373번지 발굴유형시굴, 정밀
조사기간2010.08.19. ~ 2010.09.14.
조사면적1,800㎡
유적종류경작 유    형경작유구, 추정농로
시    대조선
내    용

  유적이 있는 곳은 대가야시대의 조선소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지점의 입구에 해당되고 주변으로 고아리 벽화고분 등 대가야시대 관련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유적에 대한 조사결과, 조선시대 후기에 밭작물을 재배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경작유구 3기와 추정도로유구 1기가 확인되었으며, 유물은 유구확인 및 고랑노출작업 중에 백자완·백자편·옹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경작유구 주변지형을 살펴보면 현재는 대가천변 제방에 접하여 內地에 유적이 위치하고 있어 태풍이나 장마기간 홍수로부터 보호를 받는 구간이지만 구지형도(1918년)를 검토해 보면 하상의 변화 폭이 넓어서 조사범위의 일부는 대가천의 유수범위에 포함되기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분포확인조사에서 확인된 층위에서도 조사범위 일부가 대가천의 흐름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모래층으로 퇴적되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시굴조사 시 제4트렌치에서 현재의 강바닥 깊이까지 굴착하여 조사한 결과 모래와 자갈이 혼합된 층과 역석층이 확인되는 양상으로 볼때 시기를 정확히 추정할 수 없지만 조선시대 경작유구가 조성되기 이전에는 조사범위보다 더 서편으로 강폭이 넓게 형성되었던 때도 있었을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1663년 조방천과 1896년 오리방천이 축조되면서 수해로 인한 피해를 줄일 수 있었고 이에 제방 내부에 형성되어 있는 토지는 보다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미세한 변화를 최근 지형도상의 변화에서도 유추할 수 있었으며, 논농사 범위와 밭농사 범위의 경계변화를 통해 검토하였다.


  한편 유구확인 및 노출 작업 중 출토된 백자편은 굽내면을 외면 보다 깊이 깎아내고 발이나 종지 내저면에 8개 이상의 모래받침이 확인되는 특징으로 볼 때 대체로 19세기 후반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파악되므로 이를 통해 경작유구의 시기를 가늠할 수 있었다. 경작유구에서 확인된 곡물류의 분석결과 탄화된 씨앗류 중 보리와 콩으로 추정되는 종자가 확인되었다. 경작유구는 이랑밭의 형태인 점을 볼 때 보리씨앗은 윤작에 의해 잔류한 것이거나 경작 당시 주변에서 유입된 것일 가능성이 있어 콩 재배와 관련된 밭유구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두둑에서 확인된 경작흔적을 볼 때 뿌리식물을 식용으로 하는작물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이와 관련해서 감자, 땅콩, 고구마, 마늘 등의 작물이 재배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중 홍수기를 피해서 재배와 수확이 가능한 감자의 재배가 효율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고령 고아리 373유적은 유적의 북편 약 500m 지점에서 조사된 고령 세라믹도로조성사업부지내 유적에서 확인된 경작유구와 함께 조선시대 후기에서 일제강점기 초반 무렵 고령읍민의 당시 농경상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동시에 삼국(대가야)시대 이후 주산 기슭에 분포하고 있는 통일신라, 고려시대 유적들과 더불어 조선시대 후기 하천변 척박한 지대에 농사를 지으며 농경지를 조금씩 확장했던 지역민들의 생활상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