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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지산리 232-56유적(高靈 池山里 232-56遺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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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적 명고령 지산리 도시계획도로(중2-4호 소2-1호) 개설부지내 유적 문화재청 허가번호제2014-0072호
유적위치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 232-52번지 일원 발굴유형시굴, 정밀발굴
조사기간2014.02.11. ~ 2014.02.11.
조사면적시굴: 3,548㎡, 정밀발굴: 2,857㎡
유적종류생활, 생산, 분묘 유    형통일신라시대 수혈, 구, 조선시대 이전 수혈, 구, 담장, 조선시대 수혈, 구, 조선전기 월기지 둑, 월기지 배수구, 시대미상 수혈, 구,초석, 적심, 주혈, 유물포함층
시    대통일신라, 조선시대, 시대미상
내    용

발굴조사 결과, 제1구역과 제2구역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수혈과 구, 조선시대 이전의 담장과 수혈, 조선시대의 수혈과 구 그리고 시대미상의 수혈과 구 등이 확인되었고, 제3구역에서는 조선시대에 축조된 월기지의 둑이 확인되었다.

확인된 유구를 통해 주변 지형 및 기 발굴조사 된 자료의 비교 검토를 통해 남산 북사면, 특히 월기마을이 위치하는 골짜기와 주변 능선에 대가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취락이 조성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조사를 통해서는 월기마을 주변에 분포했을 대가야시대부터 조선시대의 생활유적의 유무확인 뿐만 아니라, 1960년대까지 존재했던 연못(월기지)의 축조연대를 확인하였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고 판단된다. 월기마을을 조성하고 월기지를 구축하여, 당시 고령 유학자들의 강학소가 된 월담정 등 관련 문헌이 알려져 있었고, 이를 통해 월기지와 월담정은 고령의 역사테마파크 입구에 복원하여 당시의 뜻을 기리고 있다. 그러나, 그 실체는 명확히 확인하지 못했었는데, 이번 조사를 통해 1960년대 매립한 월기지가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에 축조된 사실을 직접적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한편, 월기지의 조성과 함께 하도의 위치는 변화가 있었으며, 이후 월기마을 북편의 넓은 골짜기는 월기지 축조 이후 하도의 기능은 폐기되었으며, 이후 이 일대는 자연스럽게 농지로 개간되어, 당시 쌀생산량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농지가 확대되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