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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 죽곡리 산40유적(達城 竹谷里 山40遺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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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적 명대구 죽곡 한신 휴 플러스 공동주택부지내 유적 문화재청 허가번호제2013-1076호
유적위치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죽곡리 산40번지 일원 발굴유형시굴, 정밀발굴
조사기간2013.12.04. ~ 2014.12.31.
조사면적시굴8,501㎡, 정밀4,602㎡
유적종류생활, 분묘 유    형삼국시대 봉토분, 석곽묘, 석곽옹관묘, 석개토광묘, 조선시대 주거지, 매납유구 봉토분, 시대미상 토광묘
시    대삼국시대, 조선시대 시대미상
내    용

달성 죽곡리 산40유적은 죽곡산(해발 195.8m)의 동쪽 능선과 사면에 위치하며 기존에 알려진 죽곡리고분군Ⅱ의 범위에 포함되어 있다. 발굴조사에서는 삼국시대의 봉토분 5기·석곽묘 12기·석곽옹관묘 6기·석개토광묘 1기, 조선시대의 봉토분 1기·주거지 1기·매납유구 1기, 시대미상의 토광묘 1기 등 28기의 유구가 조사되고, 965건 1,426점의 유물이 출토되어 보고서에 모두 수록하였다.

봉토분은 대형분인 제3·4호분, 중형분인 제1·2호분, 소형분인 제7호분 등 5기가 조사되었다. 제3·4호분은 선축된 봉토를 재굴착한 후 후축분이 추가되어 하나의 봉분을 완성한 형태이며, 제3-2호의 경우에는 후축과정에서 봉분을 좀 더 확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제1·2·3호분에는 하단부 지형을 반구상으로 삭토하여 봉분을 높게 보이도록 한 대상기법이 적용되었다. 제4호분은 직경 25m 정도의 대형분으로 다사지역 일대의 최대분으로 확인되었다. 봉분은 사전기획 하에 묘역 정지, 매장주체부 조성, 매장주체부 밀봉, 봉분 성토작업의 공정을 단계별로 진행하여 완성하였다. 봉분 축조에는 내경성토방식과 함께 작업영역을 분담하고 견고성을 높이기 위한 구획성토방식이 적용되어 방사상 구획열, 구획석열, 구획표시석, 이질성토재 경계, 이색점토대, 단면 지그재그선 등 여러 가지 구획요소가 확인되었다.

매장주체부는 모두 석곽으로 반지상식, 지상식, 지하식의 구조를 보인다. 죽곡리의 재지적 특징은 제3·4호분의 선축분에 잘 반영되어 있는데, 주·부장곽이 평면‘11’자로 병렬배치되고, 보강위석을 사용하여 지상식의 매장주체부를 우선적으로 완성한 점이다. 또한 주곽 축조에 있어 벽석부를 따라 목가구 시설을 먼저 설치한 후 벽석을 붙여 쌓아 석곽을 만든 점도 독자적이다. 그리고 순장풍습이 확인된 점이나 금동관과 금동관식 등 주요 위세품이 출토된 점도 고총 주피장자의 지위와 관련하여 주목된다. 그 외 소형 석곽묘와

석곽옹관묘는 봉토분의 하단부에 걸쳐 분포하며, 석곽옹관묘는 고총이나 소형 봉토분의 배장묘로 확인된다.

출토유물 중 토기류는 대구 서북부에서 주로 확인되는 무투공고배를 비롯한 다수의 재지양식토기와 함께 외래계인 경주양식토기가 일부 있다. 기존 연구성과와 출토유물의 분석을 통한 봉토분과 소형 석곽묘의 상대서열 및 조성시기는 제1·2·4-1호분(5세기 3/4의 늦은 시기) → 제3-1·4-2·7호분(5세기 4/4) → 제3-2호분·제9호 석곽묘(6세기 1/4) → 제11·12호 석곽묘(6세기 2/4)의 순으로 판단된다.

유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죽곡리고분군은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수되고, 대구와 성주지역을 연결하는 주교통로 상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5세기 이후 신라의 내륙진출에 필요한 수운교통 및 육상교통의 결절지에 해당하며, 이를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 선택된 지방세력과 관련된 분묘군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죽곡리 고총의 주피장자들은 신라의 군사적 목적에서 축조된 죽곡리산성을 운용하고 대가야의 견제 및 주요 교통로를 통제·관리하던 재지세력의 지배층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죽곡리고분군과 산성의 조합상, 지정학적 입지, 고총의 봉분축조기술·매장주체부 구조·출토유물 등은 인근 문산리고분군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동질적인 요소를 보여준다. 기존 연구에서도 이를 지적하고 있으며, 조성시기와 축조 배경적인 측면에서도 유사하여 두 고분군은 동일 집단에서 축조했을 가능성이 높다. 더불어 5세기 말~6세기 초에 이르면 두 고분군에서 고총의 영조가 완전히 중단되는데, 이는 이 일대에 대한 신라의 지배권이 안정되고 직접지배가 실시되었을 가능성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