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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검단지구 유적(仁川 黔丹地區 遺蹟)Ⅰ~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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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적 명인천광역시 서구 불로동과 당하동 일원의 검단지구 (2․3단계 구역) 택지개발사업지구내 유적 문화재청 허가번호제2015-0568호
유적위치인천광역시 서구 불로동․당하동 일원 발굴유형시굴, 정밀발굴
조사기간2015.11.16. ~ 2018.01.04.
조사면적88,600㎡
유적종류복합 유    형신석기시대 주거지 1기, 청동기시대 주거지 156기, 지석묘 1기, 토광묘 1기, 수혈 2기, 초기철기시대 주거지 2기, 목관묘 3기, 수혈 3기, 구 1기, 원삼국~삼국시대 토기요 2기, 주거지 2기, 주구묘 13기, 목곽묘 12기, 토광묘 1기, 수혈 71기, 구 9기, 주혈군 2기, 통일신라시대 석곽(실)묘 25기, 고려시대 묘 2기, 조선 이후 건물지 14기, 주거지 27기, 묘 71기, 와요 1기, 수혈 242기, 구 16기, 노지 4기, 매납
시    대신석기시대~고려시대 ․조선이후․근현대
내    용

시굴조사 : 2015. 11. 16. ~ 2016. 10. 24.

정밀발굴조사 : 2016. 6. 20. ~ 2018. 1. 4.


  인천 검단지구 유적은 한국토지주택공사에서 실시하는 택지개발사업과 관련하여 우리 연구원이 담당한 2․3단계 구역의 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7개 지점(면적 88,600㎡)을 대상으로 정밀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조사결과, 신석기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다종다양한 유구 695기와 관련유물 2,088점이 출토된 대규모의 복합유적임이 확인되었다.

   신석기시대는 Ⅱ-1D구역에서 주거지 1기가 조사되었다. 벽면을 따라 8개의 주혈을 설치하고 내부에 노지를 둔 형태인데, 주변지역의 주거지와는 평면형태와 내부구조에 있어 다소 차이를 보인다. 유물은 모두 편으로 출토되었는데, 횡주어골문과 사격자문이 시문되었다. 조성시기는 기존의 편년안과 AMS연대 측정결과를 근거로 신석기시대 후기 후반으로 보았다. 

청동기시대는 156기가 조사된 주거지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데, 동사업지구 내 유적에서 확인된 주거지를 포함하면 500기 이상이며, 동일문화권으로 판단한 김포지역까지 합치면 중서부지역 최대의 취락유적이다. 이 지역 주거지의 내부구조와 무문토기의 양상은 전형적인 역삼동유형에 속하며, 석기류는 서북한의 팽이형토기문화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취락의 규모와 수량, 구조적 특징과 유물의 양상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인천 검단과 김포지역이 청동기시대 전기를 대표하는 역삼동유형의 성립을 보여주는 새로운 전환지가 될 것으로 예측된다. 

초기철기시대 유구는 주거지, 목관묘, 수혈 등이 검단지구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주거지에서는 삼각형점토대토기가 출토되었고, 목관묘에서는 원형점토대토기와 철부가 공반되어 이 지역의 철기 유입시점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원삼국시대는 토기가마를 비롯하여 분묘가 주를 이루는데, 가마는 불로동유적의 가마와 함께 당시의 토기생산 및 요업체계를 복원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주구묘(목곽묘)는 검단지구에서는 가장 많은 수가 조사되었는데, 대형의 주구를 갖춘 묘와 함께 청동제 검격부철검과 환두도, 철창, 철촉 등의 무구류는 유물의 질과 양에 있어서 이 지역 최고지배자의 무덤임을 말해준다. 더불어 김포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세력의 범위가 좀 더 내륙인 검단지구까지를 포함하고 있었음을 확인하였고, 이 과정에서 집단간의 이동 또는 분화를 상정하였다. 

통일신라시대는 7세기 중반 이후의 횡구식석곽묘가 대부분이며, 호석과 주구를 설치하여 묘역을 갖춘 석곽과 함께 횡혈식석실이 일정한 기획 하에 조성되었다. 특히 횡장방형 현실에 좌편연도를 갖춘 횡혈식석실은 이 지역 뿐 만아니라 경기권에서도 처음 확인된 사례로 추후 묘제의 계통연구에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이다.

조선시대 이후는 386기의 생활·생산·분묘유구가 조사되었다. 수량면에서는 검단지구 유적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지역별로 지점을 달리하여 분포하므로 동일한 성격의 유구를 단위로 묶어 검토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주요 유구에서 출토된 유물의 검토를 통해 15세기 중반에서 17세기에 대부분의 유구가 조성된 것으로 판단하였다.